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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 식량보다 정찰 위주로 해줘. 다른 데로 슬슬 옮길 준비를 하자.”
가방을 메고 나가려는 루피에게 지도를 건네주며 말하자 루피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건네받고는 밖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해선 내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지금 이곳에 루피를 혼자 두면 어떤 행동을 할 지 몰랐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선 그를 배웅했다. 루피가 나가고 좀 더 큰 지도를 펼쳐들은 나는 곳곳에 엑스자가 쳐진 곳을 피해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보며 고민했다.
“차라리 바다 쪽으로 나가볼까. 위쪽은 이미 틀렸고...”
바다에선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 한번 알아볼 겸 밑으로 내려갈까 고민을 했다. 약간 멀긴 해도 어차피 시간은 많다. 조심만 하면 될 것이다. 나는 시야 한구석의 방문을 흘긋 쳐다봤다.
“조용하네.”
세상은 조용했다. 움직이는 생명체의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세상이 삼켜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들었지만 생각을 접어버림과 동시에 지도도 다시 접에 제자리에 놔뒀다.
**
발걸음이 빠른 에이스를 따라잡기 위해선 난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특히나 동생의 학교가 있다는 동네로 들어오고 난 후부턴 나는 보이지도 않는 듯 걸음을 옮기는 에이스에 약간 심통이 날 뻔했다.
드디어 학교가 보이고 에이스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지 이젠 달리기 시작했다. 내 체력은 이미 한계였기에 나는 달리는 걸 포기하고 학교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에이스를 바라보며 걸었다. 교복을 입고는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놈들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계단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가니 옥상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천천히 그곳에 발을 내딛자 동생이란 사람을 꽉 껴안고 있는 에이스가 보였다. 동생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 놈들이라고 착각을 한 건지 놀라 비명 질렀지만 에이스가 그런 동생을 토닥이며 괜찮다며 얼렀다. 나는 문을 닫고 잠근 후 에이스와 동생에게 다가갔다.
“사보, 가방에서 물 좀 꺼내줘.”
나는 물을 꺼내 동생에게 넘겼고 동생은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날 보다 곧 물을 받아들곤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에이스의 동생 이름은 루피였다. 루피는 계속해서 옥상 위에서 지냈다고 했다. 밖이 훤히 뚫린 곳이었기 때문에 그놈들의 소리 역시 생생하게 들려왔고 그 목소리 때문에 몇 일간은 밤에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공포에 몸을 떨었다고 했다. 겨우 용기가 나고 학교 아래층의 매점에서 먹을 것도 가져오고 양호실의 이불이라던지 등의 것들을 가져왔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피난소로 가고 싶었지만 에이스가 언젠가 이쪽으로 올 것 같았기에 차마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고생했어, 루피.”
“무사히 와줘서...정말 고마워......에이스.”
에이스는 루피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늦었어. 차라리 오늘 옥상에서 하룻밤 더 있고 내일 해가 지자마자 다른데로 옮기자. 자, 사보. 나 좀 도와줘.”
에이스는 담요를 루피에게 둘러주고는 날 끌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힘을 합쳐 양호실에서 침대 매트릭스를 분리해 옥상에 놔두곤 다시 내려가는 에이스에 난 그의 팔을 잡았다.
“곧 해가 떠. 어디가려는거야?”
“책상만 조금 가져오면 되니까. 빨리빨리!!”
난 결국 다시 내려가 책상을 다시 옥상으로 날렀다. 에이스는 마지막으로 교실에 걸려있던 커튼을 잡아 뜯고는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책상으로 문을 막는 대신 위로 쌓아올리는 행동이 이상해 뭐하냐 묻자 그는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루피가 계속해서 햇빛을 쬐서 힘들어하길래. 하루만이라도 좀 편하게 해주려고.”
책상을 얼추 사람 키만큼 쌓은 에이스는 그 위에 뜯어왔던 커튼을 쳐 그늘을 만들더니 그 밑에 매트릭스를 깔았다. 그리고 루피를 안에 눕히곤 담요를 덮어주곤 토닥여줬다. 그 사이에 해는 뜨고 학교 내에서도 바깥쪽에서도 그 놈들의 소리가 차츰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으로 듣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그 놈들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순식간에 패닉에 휩싸여 에이스와 루피를 바라보았는데 둘은 너무나 멀쩡해 순간 내가 이상한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루피는 평온한 표정으로 에이스의 손을 꼭 잡고 잠들어 있었고 에이스는 그런 루피를 토닥이다 나를 발견하곤 손을 까닥였다. 겨우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가방 한쪽에서 이어폰만 쑥 꺼내더니 내게 내밀며 이거라도 꼽고 있으라며 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귀에 꼽으니 그나마 직접적으로 들려오던 소리가 작아져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완전히 아침이 되어 온 세상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에이스 넌 괜찮아?”
“날 뭘로 보는 거야, 괜찮아.”
에이스는 웃으며 말하곤 내 등을 떠밀었다. 그늘에서 벗어난 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묻기도 전에 난 눈부신 빛에 눈을 찡그려야했다.
햇빛, 햇빛이었다.
피부에 가볍게 내려앉아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잠시 동안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따스한 무언가가 나를 꽈악 감싸 안았다. 세상은 밝았고 내 몸 또한 환하게 빛을 띠고 있었다. 물체에 색들이 자기자랑을 하듯 여러 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 틀림없는 햇빛이었다.
“그렇게 좋냐. 적당히 느끼다 들어와.”
에이스는 킬킬 웃으며 나를 향해 말했고 나는 감격에 겨워 위 아래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햇빛을 쬐고 있자니 쏟아지는 잠에 고개가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이때까지 계속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활동해서인지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난 땅에 쓰러지며 잠에 빠져 들었다.
“....에이스...?”
눈을 뜨자 어느새 그가 옮긴 건지 내 눈앞에는 루피가 있었고 루피는 내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에이스는 옥상 끝에서 약간 떨어져 밖의 건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 사보. 깼냐. 잠시만 루피 손 좀 잡고 있어주라. 안 그럼 깨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피를 내려다봤다. 루피는 깊게 잠들어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집에 있던 나도 불안함과 외로움에 싸웠었는데. 나는 루피의 손을 꽉 쥐어주며 에이스를 다시 쳐다봤다. 그가 나에게 들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못 견디고 자살했을지도 모르지. 에이스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뒤돌아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해가 지면 저기 저 건물로 가보자.”
“어디?”
“저기.”
에이스는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는 어느 한 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높은 건물이 우뚝 자리 잡고 서 있었다.
“왜?”
“크기를 보아하니 위에 헬리콥터 착륙장도 있는 것 같고 위층엔 봐, 유리로 되어 있으니 상황 파악하기도 편할 거야. 또 내 기억으론 씨씨티비도 있었거든. 또 근처에 큰 마켓도 있으니 아마 머물기엔 저기가 제일 좋을 거야.”
나는 알았다고 끄덕거렸다. 에이스는 이제 자신이 루피의 손을 잡고 있을 테니 편히 더 자두란 말에 루피의 손을 놓았다. 에이스가 나와 루피의 중간에 끼어들어 몸을 눕히곤 루피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나 역시 그의 손을 잡았다. 에이스는 뭐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손을 풀긴 커녕 깍지를 끼며 손에 힘을 주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내 손을 마주잡아줬다.
**
시간은 이미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씨씨티비를 바라보며 초조하게 루피를 기다렸지만 루피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분침이 6을 가리켰을 때 난 쇠파이프를 들고는 문을 열고 밑으로 뛰쳐나갔다. 이렇게 늦게올리가 없었다. 우리의 약속은 4시 전까진 아무런 소득이 없어도 무조건 들어오는 것이었고 그걸 지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저번에는 4시를 조금 넘었지만 그래도 바로 들어왔었는데.
“루피!!!!!”
고요한 세상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선은 마트와 편의점으로 뛰어갔지만 누구도 있지 않았다. 하늘의 색이 점차 바뀌고 있었다.
“루피!!!! 루피!!!!!”
옆 동네로 넘어와 달리는 도중 강둑에 우뚝 서 있는 존재가 보였다. 허겁지겁 달려가 팔을 잡고 돌려세우자 울었는지 볼 위에 길게 눈물자국이 나 있는 루피가 나를 바라봤다.
“루피!!! 미쳤어?!!??!! 빨리 돌아가자, 시간이 없어.”
나는 루피의 팔을 이끌었지만 루피는 고개를 저으며 버텼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힘으로 루피를 들춰 메고 다시 달렸다. 이미 하늘은 새벽의 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
“우앗, 이게 뭐야!!!”
루피는 밑을 가리키곤 소리 질렀고 앞서 걷던 에이스와 난 동시에 뒤돌았다. 루피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보자 맨홀 뚜껑이 열려져 있는 곳이었는데 그 밑에는 적어도 수십 마리의 그 놈들이 몰려있었다. 에이스는 루피를 그곳에서 떨어트렸고 나는 약간 거리를 두고 다가가 안을 들여다봤다.
“아마 이 안에 생존자가 숨어있었나본데. 그걸 먹으려 이놈들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한 거야.”
루피는 끔찍하다며 온 몸을 부르르 떨고는 어서 가자며 우리들을 재촉했다.
빌딩 맨 위층에 나름대로 우리의 아지트를 꾸미고선 우린 밤마다 동네를 돌아다녔다. 혹시 모를 생존자 찾기와 필요한 물품들을 찾으며. 또한 생존자들이 모이는 피난처 역시 다녀와봤지만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안에 사람은커녕 그놈들만 있어 우리는 포기하곤 서로 힘을 합치며 살아가기로 했다. 세상은 온 통 그놈들로 뒤덮였고 누구도 우릴 구해줄 수 없었다. 세상에 오직 우리 3명만 남은 느낌이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이제 이쪽 동네도 슬슬 끝나가네.”
“조금 더 여기 있자. 정 안되면 옆 동네로 가면 되고.”
에이스의 말에 루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 더 있자면서 내 팔을 흔들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알았다고 답했다.
집으로, 우리의 피난처로 돌아가던 도중 아까 그놈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 근처에 다다랐다. 어둠 속에선 맨홀이 잘 안보이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무 그것에만 신경을 썼는지 콘크리트를 넘다 발을 헛디뎠고 땅을 짚으려는 순간 훅하고 빠지는 감촉에 바로 앞이 아까 그 맨홀이라는 걸 깨달았다. 망했다, 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는데 누군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과 동시에 내 옆을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에이스!!!!!!!!”
나는 땅에 두 손을 짚고 넘어진 채 있었고 그런 내 눈 앞으로 루피가 뛰어들더니 맨홀 안으로 막대를 집어넣었다. 상황파악이 되질 않아 멍하니 그저 바라보고 있자 루피가 도와달라는 말을 했고 그제야 난 허겁지겁 일어나 루피를 도와 맨홀 안에서 에이스를 끄집어냈다.
“에이스...!!”
“.....괜찮냐 사보.”
허겁지겁 에이스의 상태를 보려는데 그런 나를 제지하고는 에이스는 내 상태를 물어왔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며 에이스는 길게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루피, 사보.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에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린 것 같다.”
**
이곳저곳에서 신음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해가 곧 수평선너머로 얼굴을 나타낼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건물에 도착해서 계단을 두세 개씩 올랐다. 창문으로 햇빛이 길게 나를 비췄다. 밑에는 이미 깨어난 그 놈들이 소리 지르며 나를, 우리를 쫓고 있었다. 루피를 내려놓고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구멍으로 집어넣으려는데 손이 너무 떨려 몇 번이나 실패했다. 겨우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루피, 얼른!”
루피의 팔을 잡아끄는데 루피가 얕게 기침했다. 그리곤 내 등을 밀어 날 안으로 집어넣었다.
“뭐하는....거야?”
루피는 다시 한 번 기침했다. 입을 막았던 손을 바로 내렸지만 잠깐 보인 손바닥엔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왜인지 루피의 눈이 많이 충혈되어있다.
“사보.”
루피는 다시 콜록거렸다. 입에서 피가 한줄기 주륵 흘렀다. 루피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리곤 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놈들이 꽤 올라온 건지 계단층계에 비명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루피, 이건...”
팔 안쪽에 선명히 새겨져있는 이빨 자국과 함께 살이 약간 뜯겨나갔던건지 피 딱지가 앉아 있었다.
“사보를 위해서, 에이스를 위해서라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 미안해.”
“루피.....거짓말이지...어서......어서 안으로 들어와.”
“사보. 형을 자유롭게 해줘.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루피는 문을 닫았다. 내 눈앞엔 차갑고 딱딱한 회색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기침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
우리 셋은 말이 없었다. 그저 난 멍하니 에이스의 다리를 쳐다봤고 루피는 훌쩍이고 있었다. 에이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난 그런 에이스를 황급히 붙잡았다.
“어딜가려는거야!!!!!”
“여기 있다가 그 놈들처럼 변하면 너나 루피가 위험하잖아!! 나갈 수밖에 없어!!”
“미쳤어?!!! 너 그럼 죽어. 죽는다고!!!”
“그거나 이거나!! 너희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아!! 놔!!!”
“에이스!!!!!!”
나는 주먹으로 에이스를 세게 쳤다. 에이스는 헉헉거리며 나를 바라봤고 나 역시 부들부들 떨며 그를 바라봤다.
“정신 차려. 너 이대로 나가버리면 루피는? 나는?!!!! 이미 우리는 다 같은 한 몸이야. 그러니까..그러니까...!!”
결국 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울음이 차올랐다. 루피는 우리가 다투는 걸 보고 이미 울음을 터트린 지 오래였고 에이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
“가지마...우린 비감염자잖아.... 면역자라고...그러니까...그러니까 안 변해...여기 있어...”
“사보...”
에이스는 잠시 고민하다 방 안쪽의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하자. 저 안쪽 방은 어차피 햇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내가 저기 있을게. 하루 동안 있어보고...만약 그대로면 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테니까 나오지 않으면...그땐 나를...”
“그만, 그만말해.”
나는 에이스의 말을 잘랐다. 에이스는 열쇠를 꽉 쥐며 나를 바라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미처 말로는 하지 못할 말을 눈으로 전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애써 난 그 생각들을 물리쳤다. 여기서 쓰러질 그가 아니다. 여기서 넘어질 그가 아니다.
미안하고 화나고 죄책감의 감정들이 소용돌이 쳐 내 마음을 휘저었다. 그 감정들이 눈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건지 에이스는 다가와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네 잘못 아니야, 사보.”
“......다시 나와야해.”
“응....”
“나 기다릴거야. 나와 네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기다릴 테니까 나와.”
“......”
에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옹을 풀고는 이번엔 루피에게 다가가 토닥이며 루피를 달랬다. 그리고 루피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듯 했다. 엿듣지 않으려했지만 방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저절로 내 귀에 들어왔다.
“루피, 잔인한 말 인거 알지만 혹시라도 내가 저 놈들처럼 변하면 꼭 죽여줘. 나는 인간으로 죽고 싶으니까.”
루피는 더 크게 울며 에이스를 세게 껴안았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에이스는 열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직접 손으로 문을 닫기 시작했다. 루피와 내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문이 거의 닫히고 얼굴의 반만 보일 때 에이스가 문득 손을 멈추더니 한쪽만 보이는 눈과 입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안녕.”
문이 닫혔다. 난 그가 다시 직접 그의 손으로 문을 열고 나올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우린 면역자니까.
**
눈물이 마른 듯 더 나오질 않았다. 씨씨티비의 한쪽 구석엔 얼마나 피를 토한 건지 셔츠 앞자락이 피로 흠뻑 젖어있고 여전히 입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루피가 서 있었다. 피만 없다면 평소와 같은 루피였기에 난 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 놈들이 루피에게 달려들긴 커녕 알아서 그를 피해 지나가는 걸 보고 절망했다. 루피의 충혈된 눈은 정확히 씨씨티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피....”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반응이라도 하듯 루피는 씨씨티비에서 눈을 돌리고 비정상적인 움직임으로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 세상엔 나 혼자 남은 것 같았다. 아니, 나 홀로 남았다. 다른 생존자가 더 있다고해도 이미 살 의욕을 잃어버렸다. 내 미련이 루피를 옥죄었고 에이스를 괴롭게 만들었다. 순전히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루피를 찾으러 나간다고 담요를 칠 새도 없었기에 창문 가득히 햇빛이 통과해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가끔 담요를 살짝 걷어내 옹기종기 모여 햇빛을 느끼던 우리들이 잠시 보였다 눈물에 쓸려내려갔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떨어질 때 마다 이 방안에 가득 찬 추억들이 내 눈앞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견딜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외로움과 죄책감이 나를 덮쳤다. 나는 어미 잃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저 길가엔 수많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지는 않았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에이...에이스....”
제발 나를 다시 구해줘. 그때처럼 내 보금자리에 뛰어들어와줘. 더 이상 견디기힘들때, 네가 왔던 것처럼. 나는 지금 더 견딜 자신이 없어.
나는 미친 사람처럼 책상 앞으로 가 서랍을 뒤져 열쇠 하나를 꺼내들곤 다시 손을 휘저어 다른 무언가도 집었다. 기다시피 걸어가 방문 앞에서 열쇠를 꽂아 넣고 문을 열었다. 피 냄새가 순식간에 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에이스...”
눈물로 가득찬 내 시야의 한 구석에 벽에 기대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마치 달콤한 꿈에 빠진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말소리에 반응해 천천히 눈을 뜨곤 가래가 들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봤다.
“에이스...에이스....”
에이스는 나를 바라봤다. 내 몸에 가득 담긴 햇빛도 바라봤다. 무언갈 말하려는 듯 입을 열고는 있는 힘을 다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앉은 채 그런 에이스를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날 구원해줘.
에이스가 드디어 나에게 닿았다. 손끝으로 내 무릎을 치자마자 나는 에이스를 끌어당겨 품에 가득 안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에이스는 가쁜 숨을 쉬고는 얼굴을 내 목에 파묻었다. 곧 아득, 하고 어깨에서 아릿한 느낌이 온 몸에 퍼져나갔다.
“좋아했어. 동경을 넘어, 사랑했어. 네가 내 세계의 전부였고 이젠......이 세계를 끝낼 때가 왔어.”
나는 내 어깨 살점을 게걸스레 먹는 에이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떼어냈다. 피로 잔뜩 얼룩진 그의 얼굴이, 그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얼굴을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내 피의 온기인지, 혹은 그의 온기인지 모를 따듯함이 주위를 감쌌다. 다시 한 번 아릿함이 내 입을 중심으로 퍼졌다.
“여긴 너와 나 둘 뿐이야. 이 공간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못해. 너와, 나의 세상.”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네 눈이 보였다. 네 두 눈 속 가득 내가 있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손을 들어올렸다. 이미 내 입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안녕, 에이스.
있는 힘껏 들고 있던 것으로 그의 머리를 찔렀다. 그가 무너져가는 걸 느꼈다. 나 역시. 그 위로 무너졌다.
세상엔 아무도 없었다. 암흑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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